5 research outputs found

    北魏 行臺의 運用과 그 의미

    No full text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사학과, 2012. 2. 박한제.본고는 地方行政機關으로 정착된 北齊의 行臺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이 다뤄졌던 北魏 의 行臺의 운용과 특징을 胡族 국가로서의 北魏의 통치 구조와 연관시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일반적으로 尙書臺의 地方派出機構으로 일컬어지는 行臺는 曹魏 末에 등장한 이래로 五胡十六國時期를 거쳐 北朝로 계승되었다. 北魏 六鎭의 亂이 발발한 이후 行臺의 설치가 급증했으며, 이후 北齊 시기에는 지방의 軍政과 民政을 통할하는 地方最高級統治機構로 발전하였다. 한편 北周에서는 『周禮』官制를 채용하게 됨에 따라 尙書省이 소멸되면서 行臺도 폐지되었고, 기존의 行臺의 기능은 總管으로 계승되었다. 行臺는 隋代에 부활한 이후 唐代로 계승되었다가, 貞觀年間이후로 정국이 안정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行臺는 비록 南朝에서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사례가 극히 적으며 北齊 시기와 같은 地方行政機關으로의 변화 모습도 발견되지 않는다. 즉 『通典』에서 杜佑가 東魏 출신인 侯景의 大行臺를 제외하고는 江左無行臺라고 평가한 것처럼, 南朝가 아닌 北朝에서 계승되고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行臺에 대해서는 이미 선행연구에서도 충분히 다루었다. 그러나 방법상으로는 行臺의 인적 구성, 기능, 권한의 시대적 흐름에 따른 변화 양상에 대한 통계적 분석에 치우쳤으며, 시기상으로는 行臺의 極盛期라고 할 수 있는 北齊 시기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北魏 시대의 行臺는 北齊 시기의 地方行政機關으로 정착된 行臺의 발전 과정의 過渡期로 이해되면서 독자적 의미가 부여되지 못하고 있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또한 行臺의 설치가 北朝 정권에서 발생한 현상이라는 것에는 주목하고 있지만, 단순히 鮮卑族의 舊俗으로 일컫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北魏 통치 행위의 변화과정에 대응하여 行臺를 분석함으로써, 北魏의 통치 구조와의 관련성 속에서 行臺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北魏의 行臺 설치는 대략 세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道武帝가 後燕을 멸망시키고 中山과 鄴에 行臺를 설치했을 때이며, 두 번째 단계는 中山과 鄴의 行臺를 廢置한 이후, 황제의 巡幸을 수행하는 관료로 구성된 行臺가 등장하는 시기이다. 또한 세 번째 단계는 源懷를 行臺로 삼아 使者로써 파견한 景明 4년(503)부터 시작한다. 北魏는 後燕을 정복한 직후인 天興 元年(398)년에 鄴과 中山에 각각 行臺를 설치하게 된다. 이러한 行臺는 五胡十六國時代에 설치된 行臺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사료에 등장하는 五胡十六國時代의 行臺 설치 사례는 後趙, 冉魏, 後燕, 南燕에서 각각 1건, 赫連夏의 南臺까지 포함하면 총 5건이 등장한다. 이 중 後趙의 石勒은 331년 洛陽을 함락하고 洛陽을 南都로 삼으면서 行臺御使를 두었고, 後燕의 慕容垂는 薊에 行臺를 설치하였으며, 赫連夏는 418년 長安을 함락시키고 난 뒤 전략상의 이유로 長安으로 천도하지 않는 대신 그곳에 南臺를 설치하였다. 北魏 초의 鄴과 中山의 行臺는 이러한 五胡十六國時代와 마찬가지로 정복지의 중요한 거점에 설치하는 軍鎭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行臺가 설치된 中山과 鄴지역은 재지 한인 胡族과 결합한 後燕의 잔존 세력이 배후에 남아 있기 때문에, 鎭보다는 더욱 큰 권한을 부여한 行臺를 설치하여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北魏 초의 鄴과 中山의 行臺가 廢置된 후, 景明 4년(503)에 이르기까지의 行臺는 사료상 불과 4건이 등장할 뿐이다. 이들은 軍鎭으로 설치되었던 中山과 鄴의 行臺와는 달리 황제의 巡幸을 수행하는 관료로 구성되었다. 漢族 정권에서는 巡幸이 應時之務로 평가되던 것에 반해, 北魏의 경우 宣武帝 시기에 巡幸이 급감하면서 유명무실해지기 전까지는 정복지 熟地化를 위한 황제의 중요 통치 행위로 볼 수 있다는 점에 미루어 볼 때, 이 시기의 行臺는 사료에 등장하는 것 이상으로 존재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수년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친 巡幸 중에는 國政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수의 관료가 御駕를 수행했다. 한편 巡幸 중에 도성에 잔류하는 신료들은 留臺를 구성하여 도성을 留守하였다. 또한 太武帝의 廢佛의 詔가 巡幸 중에 반포되는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듯, 황제가 도성에 부재한 상황에서도 국정의 중대사 처리에 있어 行臺와 留臺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宣武帝 시기에 이르러서는 巡幸이 급감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宣武帝 시기에는 大使와 行臺의 파견이 증대되었고, 이 시기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行臺가 등장하게 된다. 즉 景明 3년에는 源懷를 行臺로 삼아 北邊에 파견하여 구휼 및 관리의 감찰 등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이는 그 職掌가 大使와 겹친다고 볼 수 있다. 즉 두 번째 단계의 行臺와는 달리 황제와 분리되는 使者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비전투 상황에서의 구휼과 감찰에 집중된 職掌은 正光 4년 이후의 군사 활동을 위해 파견되는 行臺와도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군사적 목적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賑恤과 慰撫, 監察을 목적으로 파견된 行臺는 景明 3년 이후에서 正光年間사이에만 등장하며, 正光 4년 六鎭의 亂이 발발하고 난 후로는 大使는 감찰 등의 목적으로, 行臺는 군사적 목적을 전제하여 파견됨으로써 그 職掌이 분화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行臺와 大使 職掌은 크게 보면 監察에 포함된다. 그러나 六鎭의 亂이 발발한 이후에는 지방감찰 기능은 大使로, 監軍의 기능은 行臺가 각각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正光 4년 이후에는 刺史나 都督 등이 行臺에 임명되는 경우가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반대로 北魏 말에 大使에 임명된 51건의 사례 중 刺史였던 경우는 1건에 불과하며, 그것도 兼官이 아닌 前官이었다. 즉 실질적으로 전투가 전제되는 경우에는 行臺로, 그 외에 감찰 등을 목적으로 할 때에는 大使로 파견되었고, 行臺의 경우 刺史를 겸했으나 大使로 轉任될 경우에는 刺史에서 물러났던 裴良과 盧同 경우를 살펴보면 이는 더욱 명백하다. 즉 巡幸의 감소와 맞물려 이전에 巡幸시 담당했던 지방 감찰의 기능은 大使로, 親征의 기능은 行臺로 분화되어 계승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魏晉時期에 등장한 行臺가 南朝가 아닌 北朝에서 계승발전된 것은, 行臺의 속성이 胡族政權의 통치행위의 구조에 부합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즉 최초의 行臺가 漢族 정권에서는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인 親征과정 중에 등장하였고, 北魏의 行臺역시도 巡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다. 五胡十六國時期 이후의 北朝 국가에서는 胡族君主가 親征을 비롯하여 국가 제반사를 직접 처리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개별 현상으로서의 親征은 감소하지만 내재화되었던 그러한 특징은 行臺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되는 것이다. 巡幸이 形骸化되기 이전에도 황제는 巡幸도중에도 大使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巡幸이 급격하게 감소되면서, 기존의 大使의 역할이 강화됨과 동시에, 이전과 같았으면 황제가 親臨했을 장소와 사건에는 황제를 대신하여 行臺를 파견하게 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行臺는 屬僚의 선발권이 있으며, 大使에 비해 독립적인 요소를 더욱 포함하고 있었다. 『通典』에서 南朝의 유일한 行臺의 사례로 뽑고 있는 後景의 大行臺와, 鄧禹의 고사를 살펴본다면 行臺는 承制, 즉 황제의 旨意를 받들어 便宜行事할 수 있는 권한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行臺를 단순히 尙書臺의 地方派出機關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北齊 시기의 行臺를 전형으로 보면서 北魏 시기의 行臺의 속성을 간과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行臺의 地方官으로의 상설화 과정은 원래 使者로 파견되었던 刺史가 지방의 행정을 장악함으로써, 지방관으로 정착된 과정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刺史의 경우 장기간에 걸친 것에 반해, 行臺의 地方官化는 불과 30여년 사이에 발생한 일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行臺가 발생하게 된 胡族 政權의 구조적 측면을 도외시한 채, 지방 통제의 이완이라는 현상에 대응하여 발생하는 지방 통제 강화의 측면에서만 파악한다면, 行臺가 北朝 정권에서 보편적으로 설치되었다는 특징을 잘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이상 본고에서는 기존 연구에서는 東魏-北齊 계열의 行臺의 地方行政機關으로 변화하는 전단계로서만 이해되던 北魏 시대의 行臺를 北魏의 통치 행위의 변화과정에 대응하여 탄생한 산물임을 밝혔다. 즉 北魏 초 정복전을 통해 확보한 영토의 통치, 巡幸을 통한 熟地化 과정, 巡幸의 形骸化로 인해 기존의 巡幸을 대체하기 위해 大使와 行臺의 파견이 증가했다는 점을 대응하여 살펴보았다. 즉 北魏 正光年間 이후의 行臺의 설치가 단순히 지방 통제 이완에 대한 대응만이 아니라, 北魏의 통치 구조의 변화와 연결시켜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선행연구에서는 鮮卑族의 舊俗 등의 표현으로 막연하게 언급되었던, 北朝에서 行臺가 상설화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조금이나마 접근했다고 생각된다.Maste

    심훈의 『상록수』를 중심으로

    No full text
    학위논문(석사)--아주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2007.2현대사회는 다매체 사회이다. 이러한 시대에 인식의 전환으로 문학교육을 단지 문학만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매체문화를 토한 교육으로 나아가 문화를 바르게 향유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순수문학/대중문학이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를 버리고 대중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중문학은 시대와 당대의 민중의 취향을 반영하는 문학이다. 또, 대중성은 상업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결국 문화와 관련이 된다. 소비문화와 여가문화가 점점 발달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문학도 소비재로서의 그 성격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대중성에는 전형적인 특징이 있다. 대중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기 위한 장르성과 도식적이고 관습적인 구조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영화, 인터넷 소설 등 다른 대중매체를 활용할 때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즉, 대중문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다매체시대에 대중문화를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대중문학의 발흥기인 1930년대의 대중문학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현대의 대중문학은 이 1930년대 대중문학 발흥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는 대중문학이 식민지 시대에 언론탄압과 경제의 궁핍화로 도피와 위안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대중문화의 중요 매체였던 신문연재소설 및 잡지는 일제의 언론 탄압과 검열을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한 끝에 리얼리즘 문학 대신 대중문학을 싣게 되었다. 대중문학은 예상치 못한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이로 인해 당시의 문예물들은 사회경제적 궁핍에도 불구하고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이 시기 출판업자들은 자본가로서의 뚜렷한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신문에 소설을 현상모집을 했다. 이 때 모집한 글의 종류로 당시의 대중문학 장르의 범주를 정하자면 연애소설, 추리소설, 역사소설, 농촌계몽소설이 된다. 이 당시에는 또한 영상매체인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대중문학과 함께 당대의 대표적 오락매체가 되었다. 대중소설작가들이 영화의 영상기법들을 소설에 수용하고 그 감수성을 글로 표현했었는데, 이는 대중문학이 다른 대중매체와 상호 연관성을 있음을 보여준다. 본고에서는『상록수』를 중심으로 논의를 펼쳤다.『상록수』를 선택한 이유는 1930년대 대중문학 중 농촌계몽소설 장르의 작품으로서 장르적 패턴과 인물 및 구조가 대중문학적 특징을 잘 드러내면서 주제가 시대상을 잘 표현하며 교훈적이어서 교육적 의의가 큰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방법론을 이끌어가기 전에 먼저 대중문학과 대중문화의 관계 및 대중문학의 특징을 이론적 틀로서 살펴보았고, 1930년대 대중문학의 발흥 배경을 알아보았다. 이를 바탕으로『상록수』의 대중문학적 특징을 분석하고, 인터넷으로 활용하여 대중문학의 특성을 현대 대중매체를 활용하여 교육하는 방법을 살펴보았다. 인터넷을 활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하이퍼텍스트 소설로의 전환을 시도했는데, 하이퍼텍스트 소설은 비선조적인 유형으로서 연결점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선택해 유동적으로 글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열린 구조를 가진다. 『상록수』는 영신과 동혁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인공과 반동형 인물의 갈등과 그 극복이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하이퍼텍스트 소설로 전환할 경우 사건별, 인물별, 시간별로 할 수 있다. 또, 하이퍼텍스트는 인터넷의 다매체적 특질을 이용하여 음악, 영상, 이미지와도 연결할 수 있어 글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시청각적 효과를 제공한다. 예컨대 『상록수』에서 주요 무대가 되는 청석골이나 한석리의 배경 이미지나 내용에 맞는 배경음악을 연결점에 링크 걸어둔다면 소설을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소설은 사이버 소설이라는 현대 대중문학의 새로운 장르이다.『상록수』를 하이퍼텍스트 소설로 변용했다는 것은 과거의 대중문학이 현대 대중매체를 활용하여 재창조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대중문학을 제대로 이해하면 대중문화 시대의 문학의 방향성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문학을 제대로 교육하기 위해서는 1930년대 대중문학의 교육을 해야 한다. 이 시기는 대중문학의 발흥기로서 당대의 문화적 풍토와 대중의 취향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문학의 대중성을 연구하는 기점이 된다. 문학의 대중성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고급/대중이라는 이분법적으로 구분으로 리얼리즘 문학이나 모더니즘 위주였던 문학의 공간을 확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학의 연속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의 문학은 전후사회 특유의 멘탈리티로 봉건주의/미국식 민주주의로 재편되는 이항대립적 단순화를 형성한 1950년대의 대중문학과 정부의 독재와 산업화 정책, 사회부조리에 의한 반발심리와 퇴폐적인 현실도피 인식을 반영한 1970년대 대중문학, 군부 파시즘과 경제신화로 정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추상성과 결합하거나 자본주의적 성공을 상징하는 중산층을 담아내어 이중적인 당대 현실을 표현한 1980년대 문학, 그리고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와 함께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이 서로의 벽을 넘어서면서 대중문학이 문학사의 주류로 부상하게 된 현재의 대중문학의 전사로서 교육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즉, 1930년대 대중문학 교육은 한국문학사에서 대중문학의 위상은 새롭게 자리매김 할 수 있을 뿐더러, 현대 대중문화 속에서 문학이 가야할 길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된다. 또, 문학과 사회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학습하여 한국문학의 연속성은 물론, 대중문화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바탕으로 문화를 향유하고 발전시킬 수 있기에 한국 대중문학 교육에 있어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Ⅰ. 서론 = 1 1. 연구 목적 및 방법 = 1 2. 선행 연구사 검토 = 3 Ⅱ. 이론적 틀 = 7 1. 대중문화와 대중문학 = 7 2. 대중문학의 특징 = 10 Ⅲ. 1930년대 대중문학 발흥의 배경 = 15 1. 일제의 강압정치와 인쇄매체의 변화 = 16 2. 영상매체의 발전과 영향 = 20 Ⅴ.『상록수』의 대중문학적 교육 방법 = 25 1.『상록수』의 대중문학적 특징 = 26 2.『상록수』의 대중매체 활용 방법 = 38 Ⅵ. 1930년대 대중문학의 교육적 의의 = 47 Ⅶ. 결론 = 53 참고문헌 = 57Ⅰ. 서론 = 1 1. 연구 목적 및 방법 = 1 2. 선행 연구사 검토 = 3 Ⅱ. 이론적 틀 = 7 1. 대중문화와 대중문학 = 7 2. 대중문학의 특징 = 10 Ⅲ. 1930년대 대중문학 발흥의 배경 = 15 1. 일제의 강압정치와 인쇄매체의 변화 = 16 2. 영상매체의 발전과 영향 = 20 Ⅴ.『상록수』의 대중문학적 교육 방법 = 25 1.『상록수』의 대중문학적 특징 = 26 2.『상록수』의 대중매체 활용 방법 = 38 Ⅵ. 1930년대 대중문학의 교육적 의의 = 47 Ⅶ. 결론 = 53 참고문헌 = 57Maste

    Early Childhood Teachers' Experiences regarding the Inclusive Education in Private Kindergartens

    No full text
    corec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