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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유학의 성립과 그 의의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정체성에 관한 문제는 많은 논란이 되어왔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정체성의 규정에 관한 문제는 근대화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근대로의 전환은 근대이전의 가치체계와 근대이후의 가치체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전환을 동반하며, 그 의식의 전환이란 곧 서구적 합리에 의해 사고한다는 뜻을 묵시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화과정 안에서 일어나는 전통적 가치관과의 충돌 속에서 자신의 미래문화에 대한 보다 적합한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는 전통의 계승과 혁신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지속되어 왔다. 최근 동아시아 지역의 외환위기 이 후 더욱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유교적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적 검토 또한 19세기 서양에 의해 강요된 근대화이래 계속되어온 전통과 현대라는 문제의 연속선상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문제는 결국 근대의 문제로 귀결된다
「筍子: 樂論」의 예술사상사적 의미
순자(荀子)는 선진(先秦) 유가 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가운데, 종래에 산발적으로 맥을 이어오던 음악에 관한 사상들도 조직화하였다. 진한(泰漢)의 통일 이후 형성된 중국 고대의 음악 철학은 바로 이 순자의 『樂論』에 그 토대를 두고 형성된 것임은 물론이다. 예컨대 가장 주목할 만한 『禮記:樂記』와 사마천(司馬遷)의 사상 등은 이 순자의 『樂論』을 근간으로 하여 몇가지 사상을 첨가, 윤색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순자의 음악 사상이 중국의 음악 사상사, 나아가 예술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각종 사상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는 고전인 것이다. 본고에서는 순자가 그의 길지 않은 글 『樂論』에서 전개한 사상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논의할 문제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정리한 다음, 그의 전체 사상의 체계 속에서 어떻게 연관지어 해석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도 초점을 맞추면서, 주로 그의 몇 가지 원형적 이론이 갖는 의미를 살피고, 그것이 중국 예술사상사에 미친 영향과 비중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두고 텍스트를 고찰하고자 한다
儒家藝術精神與中國文化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국의 제 11기 3중 전회는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 회의를 통하여 중국은 정권의 교체와 동시에 경제근대화 우선의 정책을 수립하고, 이 정책에 따라 개혁·개방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요소의 유입은 중국 사회에 이로운 점들과 더불어 그에 따른 폐단들도 가져오게 되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정도에 이르기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중국의 공산당 중앙은 정신을 진작하는 캠페인을 순차적으로 내세웠다. 1986년의 사회주의적 정신문명 건설을 그 대표로 하는 정신운동은 민중의 전통적인 의식과 인간관계의 재생, 전통문화의 부활, 공자 및 유교의 재평가, 기성 종교들의 활동 재개 등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국가의 공적 영역과 전통적 인간관계에 입각한 개인들의 사적 영역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기도 하다.
近年來, 對中國的理解變得越來越重要了. 爲了更好地理解中國, 對中國文化構造的探討是極爲必耍的. 這篇論文就是本着這立場, 對先秦儒家思想中與後來中國文化的構造以及藝術論有關的思想進行了研究. 儒家創始者孔子對于周代傳統-禮樂-賦與了新的解釋. 提出禮是人類內面自發性仁的外在體現, 并在此基礎上啓發了後人在多方面的審美意識, 但在論術實際藝術時他却提出了功能的, 道具的藝術觀, 這是由于儒家思想與其他諸子思想所共有的現實性造成的.
孟子繼承幷發展了孔子的這些思想, 具有浩然之氣的孟子將孔子所强調的內面的自發性擴展到普遍的社會水平, 他在談到理想人格時提出的幾項道德品格, 影響了後來的藝術評論, 另一位繼承孔子思想學術的思想家是荀子
The Art Theory of Li Xue in Sung Dynasty
중국문화발전의 단계에 있어서 당대(唐代)의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을 띤 다양한 문화의 발전은 송대에 이르러 이론적 체계화를 통하여 더욱 성숙한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송대에는 기술, 통치, 예술, 사상, 사회조직 등 모든 면에서 중국의 창조성이 정점에 이르렀지만 내륙 아시아의 비한족 부족민들의 중국 내부로의 침입과 정복 역시 마찬가지로 정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안으로는 다양한 학자, 관료집단들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처럼 내외로 다양한 문제와 갈등을 겪고 있던 송대 사회가 철학적으로 그리고 예술 및 예술이론에 있어서 이후의 약 일천 년을 지배하게 사상들을 산출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깊이있게 연구해 볼 문제이다.
이 글은 유가와 중국문화의 관계, 특히 유가의 예술이론과 미학사상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물론 송대의 미학사상이나 예술이론이라고 한다면 그 중심에는 소식이 있지만, 이 글은 소식이 아니라 주돈이로부터 주희에 이르는 이학가들의 예술사상과 미학사상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유가전통의 흐름으로 보자면 송대의 이학가들이 그 흐름의 주류이며, 비록 예술적으로 소식의 예술사상이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는 하지만, 송대 이후의 중국사회를 지배하게 된 사상은 바로 이학가들의 사상이고, 그러한 틀 속에서 사회 전반의 여러 가지 활동들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송대 이후의 예술사상은 구체적으로는 소식의 예술사상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학이 제공한 틀 속에서이며, 바로 이학의 체계가 바로 후대의 예술과 미학의 가능성의 한계가 된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