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research outputs found

    혈소판 지정공혈자의 헌혈 지식과 부담감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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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research has been conducted to examine and analyzed directed blood platelet donor's motivation, knowledge and burden in relation to donation and to provide basic data available to public education and information for the increase of blood platelet donation. A questionnaire was made up and distributed to 101 persons who had an experience of donation blood platelet in the chemical hemonetics room of two hospitals to collect data from Apr. 1 through 20, 2000. To measure donors' knowledge of blood platelet donation, model developed by Kim Hee-jung (1999) was revised an supplemented by the author to have twenty question items of 2 point scales, while a model developed by Cho Kye-sook(1995) with total twenty question items of 5 point scales was used to measure donors' feeling of burden toward blood platelet donation. And the results of this research are as follows: 1. In the general characteristics, donors mostly were from 20 to 29 years old and most of them were male. As for marital status, 58.1% was single, and 53.5% had religion. As for education, 50.5% was university graduate, while as for profession, 60.4% was in the military, almost above the half. As for the relationship with the patient or his family, most cases were of having 'no direct relationship but from a request by someone who knew him'. As for the experience of blood platelet donation, unexperienced was 62.4%, while informed by mass media or publicity booklets was 39.5% which was the highest degree. As a motivation to donate, volunteering showed higher percentage than donation by recommendation. 2. Donors' knowledge of blood platelet donation marked 80.1 points in average ; the question most correctly answered was " Appropriateness of blood donation by the infectious case", while "The adequacy of exercising or taking a sauna after blood platelet donation" was the least correctly answered question. 3. Feeling burden toward blood platelet donation marked 2.15 points in average ; donors felt the highest degree of burden when "they were repaid by the donee's patron" and the least burden when they were happy for being a direct help even by recommendation." Among burdensome elements, time was most burdensome. 4. As for donors' knowledge of blood platelet donation in accordance with general characteristics, an experience of donation tended to heighten the degree of knowledge, an feeling of burden was greater among the married, office workers and people with above university education. Feeling of burden toward donation time was greater among the aged, female, married, office workers and people having some relationship with the patient, while the degree of emotional burden was higher with the married, financial burden with donors having experiences of donation blood platelet in the past.;최근 백혈병과 중증 재생불량성 빈혈 및 복합면역 질환의 치료방법으로 골수 이식술이 활발히 시행되고 보다 적극적인 항암요법이 적용됨에 따라 혈소판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혈소판 성분 헌혈은 헌혈자가 전혈에 비해 회복이 빠르고 짧은 기간 내에 다시 헌혈할 수 있으며, 한 명의 헌혈자에게서 대량의 혈소판을 얻음으로서 항혈소판 항체 형성율이나 수혈매개질환 이환율의 낮아 수혈자에게 보다 안전한 혈액제제를 공급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수혈횟수가 잦은 혈액종양 환자의 경우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병원 성분헌혈실을 통해서 지정공혈자들로 부터의 혈소판을 자체 공급하고 있는 혈실이지만 혈소판 헌혈에 대한 이해와 홍보가 부족하여 참여율이 낮은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는 혈소판 지정공혈자들의 혈소판 헌혈에 대한 지식과 부담감을 조사 분석해서 혈소판 헌혈의 증가를 위한 교육 및 홍보자료를 만들기 위한 기초 자료로 사용하고자 실시된 서술적 상관관계연구이다. 2000년 4월 1일부터 4월 20일가지 2개 대학병원의 성분헌혈실에서 혈소판 헌혈을 한 101명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배부하여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혈소판 헌혈 지식 도구는 김희정(1999)이 개발한 헌혈 지식 측정 도구를 본 연구자가 수정 보완한 총 20개 문항의 2점 척도로, 혈소판 헌혈 부담감 도구는 조계숙(1995)이 개발한 지정공혈에 따른 부담감 도구로 총 20문항의 5첨 척도로 측정하였다. 수집된 자료는 SPSS PC 프로그램으로 전산통계처리 하였으며 대상자의 일반적 특성은 실수와 백분율로, 혈소판 헌혈 지식과 부담감은 평균과 표준편차를 구하였고, 일반적인 특성과 헌혈 지식, 부담감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t-test, ANOVA, Pearson correlation coefficient를 구하였고, 헌혈지식과 부담감간의 상관 관계는 Pearon correalation coefficient로 구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일반적인 특성에서 혈소판 헌혈자는 20~29세 사이가 가장 많았으며, 대부분이 남자였다. 결혼 상태는 미혼이 88.1%으며, 종교를 가진 사람이 53.5%였다. 교육정도는 대재가 50.5%로 가장 많았고, 직업에서는 군인이 60.4%로 대상자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환자나 환자 가족과의 친분 관계에서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아는 사람의 부탁을 받음’경우가 가장 높게 나타났고, 과거 혈소판 헌혈 경험은 경험이 없는 경우가 62.4%로 나타났고, 혈소판 헌혈에 대한 정보 제공에서는 대중매체 및 홍보책자를 통해 정보를 제공받은 경우가 39.5%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혈소판 헌혈 동기는 자발적으로 한 경우가 64.4%, 권유에 의해서 한 경우 35.6%보다 높게 나타났다. 2. 혈소판 헌혈에 대한 지식은 총 평균 80.1점이며, 정답률이 가장 높은 문항은 전염병의 헌혈 적합 여부이었고, 정답률이 가장 낮은 문항은 혈소판 헌혈후의 운동이나 사우나 등의 가능여부이었다. 3. 혈소판 헌혈에 대한 총 부담감은 총 평균 2.15점이며, 가장 높은 부담감을 나타낸 문항은 ‘보호자로부터 헌혈에 대한 사례를 받는 것이 부담스럽다’이었고 가장 낮은 부담감을 나타낸 문항은 ‘헌혈 권유를 받고 환자치료에 직접 도움을 주게 되어 보람있다’ 이었으며, 영역별 부담감에서는 시간적 부담감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4. 일반적인 특성에 따른 혈소판 헌혈 지식은 과거 혈소판 헌혈 경험이 있는 경우에서 더 높았고, 혈소판 헌혈 총 부담감은 기혼, 대재 이상, 회사원에서 더 높았다. 혈소판 헌혈 시간적 부담감에서는 나이가 많을수록, 여자, 기혼, 회사원, 친분관계가 있는 경우에 더 높았고, 정서적 부담감에서는 기혼이, 재정적 부담감에서는 대재 이상, 신체적 부담감에서는 과거 혈소판 헌혈 경험이 있는 경우에 더 높았다. 이상과 같은 결과를 통해서 볼 때, 자발적인 동기를 유발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혈소판 헌혈에 대한 교육과 홍보 및 잘못된 지식등과 같이 헌혈 행위에 부정적인 결과를 미치는 요인들을 알아내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적절한 보건교육대책 수립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공혈자로 하여금 시간에 대한 부담감을 감소시켜주고 혈소판 헌혈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예약 제도의 확립과 효율적인 헌혈 프로그램의 개발 및 공혈자 관리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하다고 하겠다.I. 서론 1 A. 연구의 필요성 1 B. 연구의 목적 3 C. 용어 정의 4 II. 문헌 고찰 6 A. 혈소판 헌혈 6 B. 헌혈 지식과 부담감에 관한 선행연구 10 1. 헌혈 지식에 관한 선행연구 11 2. 헌혈 부담감에 관한 선행연구 13 III. 연구 방법 16 A. 연구 설계 16 B. 연구 대상 16 C. 연구 도구 17 1. 혈소판 헌혈 지식 17 2. 혈소판 헌혈 부담감 17 D. 자료수집 기간 및 방법 18 E. 자료분석 방법 18 F. 연구의 윤리적인 측면 19 G. 연구의 제한점 19 IV. 연구 결과 및 논의 20 A. 대상자의 일반적인 특성 20 B. 혈소판 헌혈 지식 24 C. 혈소판 헌혈 부담감 26 1. 혈소판 헌혈 부담감 문항 분석 26 2. 혈소판 헌혈 영역별 부담감 27 D. 일반적인 특성에 따른 혈소판 헌혈 지식과 부담감 31 1. 일반적인 특성에 따른 혈소판 헌혈 지식 31 2. 일반적인 특성에 따른 혈소판 헌혈 총 부담감 33 3. 일반적인 특성에 따른 혈소판 헌혈 영역별 부담감 33 E. 혈소판 헌혈 지식과 부담감간의 상관관계 38 V. 결론 및 제언 39 A. 결론 39 B. 제언 43 참고문헌 44 [부록-1] 연구 참여 동의서와 설문지 49 ABSTRACT 5

    A Study on University Student Movements in Korean from 1960 to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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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14. 2. 김인걸.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오제연 본고는 1960년 4월혁명 이후 약 30여 년 동안 민주화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주요 논점들을 제기하고 이를 관철시킨 대학 학생운동의 초기 국면(주로 1960년대)을, 그 주체인 대학생들의 존재조건, 경험, 문화, 이념, 조직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950년대 대학생들은 대학이라는 공간 속에서 지도적 엘리트로 규정되어 사회를 선도할 잠재력을 갖췄고, 대학의 급속한 팽창 과정에서 그 수가 급증하여 집단으로서 물리력도 함께 갖게 되었다. 또한 당시 대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의 통제와 동원에 시달리면서도 정치적으로 물리적 힘을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 1950년대 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했던 외부의 규정으로 인해, 또 그들 내부에서 새롭게 등장한 축제와 같은 대학문화를 통해 대학생들의 집단정체성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물리력이 결집하여 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모의국회나 토론회 같은 학술 행사를 통해 지도적 엘리트에 걸맞는 정치적 훈련과 각성의 기회, 그리고 대학생 상호의 접촉과 교류의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이는 학생운동의 필요조건이 될 수 있었지만 충분조건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1950년대 대학과 대학생의 존재조건은 모순된 면이 있었고, 그들의 정치적 경험과 문화도 학생운동의 구심력이 아니라 원심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1950년대 대학은 국가 발전에 필요한 전인적 지도자 양성 기관으로 규정되었으나, 실제 대학은 국가의 통제에 시달리며 동시에 병역기피자와 모리배의 소굴이라는 지탄을 받고 있었다. 대학생들 역시 질적으로 하락하고 나약하고 무기력하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다. 학도호국단의 통제와 동원이 대학생들의 자치적인 활동을 크게 제약하고 그들을 체제 순응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힘도 강했다. 대학생의 양적 급증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집단정체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고, 모의국회나 토론회 같은 학술 행사는 학생들을 관심과 활동의 폭을 학술이라는 틀 안으로 제한함으로써 오히려 학생들을 탈정치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따라서 1950년대 대학생들 사이에서 형성된 학생운동의 필요조건들이 실제 학생운동으로 분출하기 위해서는, 그 조건들을 학생운동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매개, 즉 선진적인 이념과 조직이 필요했다. 그리고 미약하나마 그 매개로서 이념서클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미소의 평화공존과 제3세계 비동맹운동이라는 국제적 차원의 냉전체제 변화 속에서, 일부 진보적인 대학생들이 1945년 영국 노동당 집권과 1951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민주사회주의를 대안적 이념으로 적극 수용하면서 드디어 대학 내에 이념서클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의 신진회, 서울대 법대의 신조회, 고려대의 협진회와 같은 민주사회주의 이념서클들은 서클 멤버들이 다른 곳에서는 하기 힘든 진보적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또 구하기 힘든 진보적 서적들을 접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념서클의 영향력은 미약한 상황이었다.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났을 때 대학생들은 뒤늦게 전면에 나섰지만 결국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켰다. 대학생들은 순수와 질서를 앞세워 도시빈민들을 배제하고 혁명의 주체를 자임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지도적 엘리트로서 근대적 국민국가 완성을 위해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시도했다. 현실참여가 대학생의 당위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는 한국이 신생국, 후진국이라는 사실이었다. 대학생들의 현실참여 의지는 후진성 탈피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 고양과 민족주체성에 대한 갈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신들의 현실참여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집단적 힘을 가지고 본격적인 학생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4월혁명 직후 학생들은 학원민주화운동과 계몽운동에 나섰다. 계몽운동은 대학생들이 혁명주체로서 4월혁명의 완수를 위해 전개한 하나의 방법론이었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자립경제 수립으로 후진성을 극복하여 국민국가를 완성하는 데 있었다. 당시 계몽운동은 객관적인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들의 의지만을 가지고 추진되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성과와는 별개로 계몽운동은 학원민주화운동과 함께 학생들이 목표 달성을 위해 보다 근본적인 방법론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정치적 경험이 되었다. 후진성의 근본원인으로 분단이 지목되었을 때 그 해결책은 통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분단이 외세에 의한 것이라고 했을 때 자주적인 통일을 추구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계몽운동 과정에서 한국사회 후진성 극복의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된 자립경제 수립은, 통일논의에서도 핵심적인 주장으로 제시되었다. 때문에 통일 문제는 곧 대학생들 사이에서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50년대부터 활성화된 각종 토론회와 강연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학생들의 통일운동 과정에서 이 운동을 주도하는 조직으로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에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이 만들어졌다. 민통련은 빠른 속도로 조직을 확장시켜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확보했으나, 동시에 조직적 균열도 심화되었다. 이 균열은 그들이 함께 추구한 민족주의 이면에 자리 잡은 민족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차이, 역시 그들이 함께 주장한 남북협상론 이면에 자리 잡은 非美非蘇 평화공존과 제3세계 민족해방 사이의 강조점 차이, 그리고 혁신계와의 연계에 대한 입장 차이 등으로 인해 발생했다. 곧바로 일어난 5.16쿠데타로 민통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대학의 존재조건도 크게 바뀌었다. 학생운동은 새로운 존재조건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대학생들은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운 군사정권에 대해 일정한 기대를 갖고 협력도 하였으나, 한일회담반대운동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과 학생들의 민족주의 사이에는 균열과 분화가 뚜렷해졌다. 박정희 정권은 민족주의를 근대화, 정확히 말하면 경제성장, 생산력증진을 위한 국민 동원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는 한국인들 사이의 점증하는 민족주의를 경제건설의 동력으로 이용하고자 한 1960년대 미국의 대한정책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즉 통일문제와 민주주의 문제를 배제하고 오직 산업화만 강조하는 근대화론이 박정희 정권의 민족주의의 실내용이었던 것이다. 반면 학생들은 4월혁명 이후 통일운동 과정에서 확산된 三反(반봉건, 반외세, 반매판)테제에 입각한 민족혁명론적 지향을 가지고, 비민주적이고 불평등적인, 외세의존적이고 반통일적인, 예속적이고 매판적인 현실에 저항하며 박정희 정권과 대립하였다. 쿠데타로 인해 능동적인 현실참여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대학생들은 우선 학내 행사에 주력했다. 특히 이 시기 각 대학에 축제가 확산되었는데, 이 축제에서 거행된 몇몇 정치풍자 프로그램들은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자연스럽게 정부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의식도 커졌다. 또한 군사정권은 대학생들을 농촌운동에 동원하여 그들의 현실참여 의지를 순치하려 했으나 이 운동은 농촌으로 상징되는 강력한 민족주의 이념에 따라 한일협정반대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 측면도 있었다. 미군범죄에 항의하며 쿠데타 이후 최초로 전개한 한미행정협정 촉구시위 역시, 학생들 스스로 이 시위가 반미나 반정부가 아님을 분명했지만 학생들의 민족의식과 주체적 역량을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62년 한미행정협정체결 촉구시위에 앞장섰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각 대학에 민족주의를 앞세운 이념서클들이 속속 만들어지면서 학생운동의 역량은 크게 신장되었다. 그리고 이들 이념서클의 주도 하에 1964년부터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 추진을 반대하는 거대한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똑같은 반외세, 반매판의 민족주의를 앞세웠지만, 이념서클 혹은 회원들 사이에는 과거 민통련의 균열과 마찬가지로 그 바탕에 깔린 이념적 기반의 차이가 존재했다. 결국 한일회담반대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들 이념서클은 해체되거나 큰 타격을 입어 학생운동이 일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고 양적 경제성장을 추진하면서 한국사회의 구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경제성장이라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국가가 대학에 요구하는 목적이 기존의 전인적 지도자 양성에서 고급 기술인력 양성으로 바뀌면서, 대학생들의 위상도 지도적 엘리트에서 기능적 엘리트로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회경제적 구조와 대학의 존재조건이 변화하면서 학생들의 의식도 미묘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4월혁명 이후 확립된 대학생들의 엘리트로서의 자신감과 사명감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고민도 함께 등장하고 있었다. 특히 대학생들은 경제개발 과정에서 심화된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대학생들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1960년대 후반기 학생운동이 사회 전반에 대한 민주화를 지향했던 근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또한 대학생들은 민족주체성과 민족문화 진흥과 같은 박정희 정권의 지배논리를 일정정도 공유하면서도 정권에 의해 배제된 민속에 주목했고, 자신이 직접 탈춤을 배워 이를 연행하면서 민속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 창조와 민중에 대한 관심은 학생들을 복고주의가 아닌 현실참여로 나아가게 했다. 이 과정에서 문화는 정치의 우회로로서 학생운동에서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집회나 시위에 대한 처벌 강화는 물론 일상적인 행사에까지 개입하여 학원을 통제하려 했다. 특히 안보위기를 거치면서 대학에 교련수업을 도입하고 이를 강화하면서 학원 병영화까지 시도했다.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며 교련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교련반대운동은 결국 학원 민주화를 거쳐 민중의 생존권을 옹호하고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사회 민주화로 나아가는 시작점이었다. 사회 민주화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경제개발로 인해 심화된 불평등의 모순으로 고통당하는 민중에 대한 학생운동의 관심은 조금씩 커졌다. 특히 전태일 분신사건과 광주대단지사건은 이를 촉진시켰다. 이제 학생운동의 이념으로 기존의 민주, 민족과 더불어 민중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4월혁명으로 정립된 1960년대의 三反(반봉건, 반외세, 반매판)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 권력 강화와 양적 경제성장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1970년대에 들어와 三民(민중, 민주, 민족)으로 그 중심이 옮겨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1960년대 후반 각 대학에서 재편성 된 이념서클이 있었다. 1964년 계엄령, 1965년 위수령으로 침체되었던 민족주의 이념서클은 1960년대 후반 다시 활성화되었고, 상호간의 접촉과 교류, 연대와 조직화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 발동으로 학생운동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약 10년간의 학생운동 초기 단계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이제 학생운동은 그동안의 공개적인 이념서클을 위주로 한 활동을 접고, 보다 은밀하게 지하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전의 이념서클 보다 훨씬 더 체계적인 사회과학 학습으로 무장한 새로운 언더서클들이 등장하여 유신체제의 사찰과 탄압을 피해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학생운동의 새로운 국면이 열린 것이다.목 차 서론 ................................................................................ 1 一. 4월혁명 이전 학생운동의 기반형성 1. 1950년대 대학의 위상과 대학생의 경험 ..................... 18 1) 지도자 양성기관으로서의 대학과 대학생의 양적 팽창 ...... 18 2) 학도호국단의 관제데모 참가와 학생 동원 ......................... 29 3) 대학문화를 통한 대학생의 정체성 형성과 정치적 역량 강화 ............................................................................................ 41 2. 이념서클의 등장과 시련 ............................................... 54 1) 현실 비판의식 태동과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관심 ............. 54 2) 주요 대학 이념서클의 조직 상황과 정부의 탄압 ............... 62 二. 4월혁명 이후 대학생의 현실참여와 통일운동 1. 대학생의 현실참여 의지 고양 ...................................... 75 1) 대학생의 혁명주체 자임 ................................................... 75 2) 학원의 자유 요구와 학원민주화운동 .................................. 94 3) 계몽운동의 자립경제 지향과 후진성 극복 과제 ............. 99 2. 통일운동의 활성화와 추진 조직의 경향성 .................. 112 1) 통일논의의 활성화 ........................................................... 112 2)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의 결성 ..................................... 117 3) 남북학생회담 제안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 128 三. 5.16쿠데타와 한일회담반대운동 1. 군사정권 하 대학생들의 현실인식과 현실참여 .......... 147 1) 군사정권에 대한 대학생의 인식 ................................... 147 2) 축제를 통한 현실 풍자와 비판의 확산 ............................ 166 3) 농촌운동과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시위 ......................... 174 2. 이념서클의 한일회담반대운동 주도 ............................ 193 1) 민족혁명론 對 민족적 민주주의 .................................. 193 2) 민족주의 이념서클의 확산 ............................................... 202 3) 이념서클 간 접촉과 동시 시위 ........................................ 220 四. 박정희 정권의 독재 권력 강화와 대학생의 반독재 민주화운동 1. 대학사회의 변화와 학원 통제 강화 ............................ 229 1) 고급인력 양성기관으로서의 대학과 대학생의 현실인식 .. 229 2) 민속과 민중문화에 대한 관심 고조 ................................. 247 3) 일상적 학원 탄압과 병영화 ............................................. 259 2. 이념서클의 재편과 반독재 민주화운동 ....................... 267 1) 소위 지하신문의 발행과 민중의식의 대두 .................... 267 2) 각 대학 이념서클의 재편 ................................................. 276 3) 교련반대운동과 이념서클 간 연대 ................................... 294 결론 ............................................................................ 307 참고문헌 ..................................................................... 315 Abstract ..................................................................... 328 표 목 차 1945~1960년 고등교육기관과 학생의 수 ......................... 23 군사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 설문조사 ....................... 150 각 대학 농촌운동 현황 ..................................................... 178 1961~1973년 고등교육기관과 학생의 수......................... 234 ≪자유의 종≫ 기사의 내용별 분류 .................................. 273Doc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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